실경에 담긴 이화우(梨花雨)의 감수성
글|김상철 미술세계 편집주간
희디 흰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서정적인 화면은 작가 김영옥이 포착한 봄의 빛깔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구릉 같은 산자락을 따라 좌우로 펼쳐지는 오래된 과수원의 풍광들은 온통 배꽃들이다. 과수원과 과수원을 경계 짓는 노란 개나리나 이웃한 복사꽃 무리는 오히려 배꽃의 흰빛을 더할 뿐이다. 하얗게 펼쳐지는 백색의 꽃무리는 은은하고 고요하여 일견 처연하기까지 하다. 사실 배꽃의 정서는 복사꽃의 요염함이나 벚꽃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무리지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지만 경망스럽지 않고,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꽃망울을 틔우지만 굳이 화려함을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배꽃은 일종의 애잔하고 처연한 비감미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흐드러진 배꽃을 이화우(梨花雨)라 표현하였다. 낭만적 서정이 물씬 배어 나오는 감수성 짙은 말이다. 흐드러진 배꽃은 살랑이는 봄바람에도 가볍게 제 몸을 날려 온 세상을 온통 흰색으로 물들인다. 작가는 이를 순백의 요정이라 말하고, 함박눈이 내린 듯, 솜사탕 같은 구름이 내려앉은 듯 하다고도 했다. 이러한 감수성이 그로 하여금 배꽃 흐드러진 과수원을 특징적 요소로 하는 실경 작업을 하게 한 동인일 것이다.
작가가 포용하고 있는 과수원의 풍광들은 전형적인 실경 산수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지나친 과장이나 억지스러운 설정을 배제한 체 오로지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포착한 내용들을 침착하고 차분하게 표현해 나아가는 방식은 솔직하고 진지한 것이다. 운필의 기세를 강조하기 보다는 현장의 생기를 중시하고, 구도의 기이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평안하고 자연스러운 현장감을 취하고자 하는 작가의 화면은 보는 이의 눈높이에 절로 맞추어진다. 별반 특이하거나 두드러진 것도 없는 평이하고 일반적인 농촌 과수원의 풍광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서정성 짙은 독특한 감성의 화면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을 살펴보면 이미 일정 기간 동안 수묵을 위주로 한 실경산수 작업에 매진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작업에서의 운필과 용묵의 묘취는 작가의 작업이 이미 일정한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근작의 배꽃 작업들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기교적이고 정형화된 작업 방식들은 배제되고 보다 객관적이고 진지한 작업 방식이 두드러지고 있다. 작가는 육안에 의해 포착된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와 순간적인 감정들을 고스란히 표출하려는 듯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필촉을 더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들이 수묵을 위주로 한 세(勢)의 발현이었다 한다면, 근작들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들은 바로 객관적인 표현을 통한 운(韻)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즉 이성적이고 정형화된 형식의 틀을 벗음으로써 그의 화면은 상대적으로 감성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생기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경의 전제 조건은 당연히 발품을 팔며 현장을 답사하여 건져 올린 직접적인 교감의 내용일 것이다. 봄이면 작가가 멀리 전남 나주로부터 경기도 성환, 장호원을 거쳐 서울의 태릉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누비듯 종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화면에는 이러한 다리품의 흔적들이 여실하다. 작가는 이렇게 건져 올려 진 내용들에 대하여 구구한 해설이나 가공을 더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온전히 수용함으로써 실경, 혹은 현장의 기운과 분위기를 전달함에 더욱 주목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낮게 좌우로 펼쳐진 일상적인 구릉 지대의 과수원과 허름한 원두막, 그리고 이에 더해지는 우뚝 선 미루나무는 바로 그가 포착하고 교감하는 대자연의 구체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작가는 이를 세세한 관심과 애정으로 화면에 안치시킴으로서 조형을 구축해 나아간다. 이는 당연히 실경 본연의 덕목에 충실한 작업 방식이라 할 것이다.
실경의 궁극적인 지향이란 사경(寫景)의 과정을 거쳐 진경(眞景)에 이르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인상과 감동을 취하고 이를 가공하여 주관화하는 과정에 대한 해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객관적인 자연은 번잡하고 복잡다단한 온갖 다양한 변화와 조형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다. 이를 여하히 개괄하고 취사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작가의 개성과 시각이 투영되어 조형화되게 마련이다.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교감을 하고, 이를 통해 얻어진 일정한 이미지를 가공하여 조형화하는 일련의 과정은 바로 실경 작업의 순차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렇게 채집되어진 이미지들을 수묵담채라는 전통적인 표현방식으로 수용함은 바로 객관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해석과 재구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실경의 궁극적인 귀결점은 당연히 자명해 질 것이다.
작가의 조형 의식은 진지하고 건강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감성적인 접근, 그리고 이를 서정적인 화면으로 수용하여 조형화함은 작가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장점일 것이다. 별반 수식하거나 과장함이 없이 소박하고 평안하게 다가오는 화면은 바로 이러한 내용들의 구체적인 반영인 셈이다. 이미 일정 기간 수묵을 통한 실경 작업 과정을 거친 작가가 새삼 몰입하고 있는 배꽃 흐드러진 과수원의 서정적 화면은 분명 새로운 변화이자 새로운 작업의 경계를 열어가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개괄과 취사선택의 과정이 보다 강화되고 강조된다면 작가의 작업은 진일보한 발전을 보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이 전형적인 실경의 작업 양태를 띠고 있으며, 실경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나 재현이 아니라 주관화된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방편임을 상기할 때 이는 다시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작가의 분발과 발전을 기대해 본다.